15세기말의 '포르투갈 왕국(Rei de Portugal)'은 아시아와의 직접적인 무역을 목표로 하는 해양 탐험에 집중하고 있었다. 특히 향신료와 다양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해상 경로를 찾는 것이 중대한 과제로 여겨졌다. 이 과정에서 포르투갈은 대서양 연안을 탐사하며 아프리카를 우회하여 아시아로 가는 길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인도'를 향한 여정
역사적인 탐험가 '바르톨로뮤 디아즈(Bartolomeu Dias)'는 1450년경 '포르투갈 제국(Reino de Portugal)'의 '리스본(Lisboa)' 근교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출생지와 정확한 생애 초기 정보는 명확하지 않지만, 당시 포르투갈이 해양 탐험과 상업 활동에 집중하며 번영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기에 디아즈도 바다와 관련된 환경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디아즈, 탐험에 눈을 뜨다
디아즈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가족은 해군과 관련된 직책을 맡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배경 덕분이었을까. 바다와 항해에 유독 관심이 많아진 그는 젊은 시절부터는 해군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기 시작했고, 이 경력은 후에 중요한 탐험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당시 포르투갈 왕국은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연결하는 항로 개척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 이 원대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는 뛰어난 해군 장교들이 필요했다.
이 기회를 놓칠 세라 디아즈는 왕실의 지원을 받아 해양 탐험에 참여하게 되었고 마침내 1487년, 포르투갈 왕 '존 2세(Dom João II)'는 디아즈에게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을 돌아 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찾으라"는 임무를 부여하게 된다. 이 임무는 '인도와의 직접 교역'을 위해서는 필수적이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우(Nau)'와 '나오(Nao)'
대형 선박을 대표하는 카라카 또는 카락(Carrack)은 생산국에 따라 명칭과 용도가 달랐다. 포르투갈에서 생산된 카락은 나우로,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연결하는 무역 선박으로 활용됐으며 스페인에서 생산된 카락은 나오로 규모가 더 컸다. 이는 대서양 횡단과 아메리카 탐험 및 식민지 개척 등에 무역과 군사적 목적으로서 활용됐다.
디아즈는 '신항로 개척'의 임무를 부여받은 해 8월 10일, '성 크리스토퍼 호'라는 이름의 나우 1척과 '성 가브리엘 호', '베리오 호'라는 캐러벨 2척 그리고 150명의 승무원과 함께 리스본 항에서 돛을 펼쳤다.
디아즈 일행은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하면서 여러 해안을 지나갔다. 이어서 '모로코'와 '앙골라' 근처를 지나 아프리카의 최남단으로 향하였다. 예측할 수 없는 기상 변화와 식량 부족, 선원들의 사기저하 등 온갖 고난을 극복해야만 했다. 몰아치는 폭풍우에도 불구하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해류를 이용해 마침내 대륙의 끝에 도달할 수 있었다.
'희망의 곶'에 도달하다
그 해 2월에 접어들어 도착한 지역은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미지의 세계'였으며 그는 이곳에서 마주한 거친 파도와 폭풍우에서 착안해 '폭풍의 곶(Cabo das Tormentas)'이라 불렀다. 이후 이 지점이 아시아로 가는 중요한 항로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 인식해 '좋은 희망 곶(Cabo da Boa Esperança)'으로 명명하였다.
디아즈는 좋은 희망 곶을 넘어 아시아로 향하는 경로를 계속 탐색하고자 하였으나, 식량 부족과 승무원들의 피로로 인해 더 이상 항해를 지속할 수 없었다. 그는 1500km 이상 항해한 후, 아프리카 동쪽 해안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488년 5월, 리스본에 닻을 내린다.
죽음도 무릅쓴 '탐험정신'
디아즈의 탐험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이후 1497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바통을 이어받아 이 경로로 인도에 도달해 본격적인 아시아와의 무역이 시작된다.
오늘날 디아즈는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악명 높은 유령선 '플라잉 더치맨'의 실제모델로도 유명한데 그도 그럴 듯이, 후발대인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도달해 그의 영광을 앗아갔으니 그런 속설이 생길 만도 하다. 그의 탐험정신은 현재까지도 포르투갈 해양 제국의 확장과 아시아 무역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그 후 디아즈는 포르투갈 해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며, 1498년에 포르투갈 왕국으로부터 또다시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 항해를 떠났다. 당시 그는 해군 제독 '프랜시스코 드 알메이다(Francisco de Almeida)'와 함께 브라질과 아프리카 동쪽 해안을 조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 항해는 아프리카 동쪽 해안을 따라 진행되었다.
디아즈는 이 항해에서 '브라질'에 도달하였으나, 항해 도중 심각한 건강 문제와 기후 조건으로 인해 고초를 겪었다. 1500년 5월, 그의 배는 인도양에서 '모잠비크' 근처에 위치할 때쯤 폭풍우에 휘말리고 만다. 이 폭풍으로 인해 함대는 큰 피해를 입게 되고, 위대한 탐험가 디아즈는 그 폭풍 속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그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와 극단적인 항해 조건이 주된 원인으로 추정되며, 정확한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디아즈의 사망은 당시 포르투갈의 해양 제국 확장과 아시아 무역을 위한 탐험에 있어 중요한 인물의 손실로 여겨졌다. 그의 후계자들은 그가 개척한 항로를 디딤돌 삼아 이어 나가면서 포르투갈 제국의 해상 무역을 더욱 확장해 나가게 된다.
디아즈의 여정이 준 영향
그의 업적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전례에 없던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다음과 같다.
1. 직접적인 영향
- 아프리카 남단의 신항로 개척: 아시아로 가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유라시아를 연결하는 중요한 기틀 마련
- 포르투갈 제국의 해양 영향력 확장: 디아즈 이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도달하는 데 중요한 발판을 마련
- 과학기술의 발전: 지도 제작술, 지리학, 천문학적 항법, 해양학적 연구 촉진 등 다양한 과학기술의 발전에 기여
2. 간접적인 영향
- 유럽의 제국주의 팽창: 아시아와의 직접 교역을 통해 향신료 무역 및 자원 확보에 이바지
- 유라시아의 문화적 교류: 비단, 각종 향신료, 도자기 등의 유입으로 인한 동·서양 간 문화융합
- 세계 경제의 변화: 직접 교역을 통해 유럽은 실질적으로 경제적 독립을 이루었으며 상업 자본주의 및 근대 경제 시스템으로의 발전을 촉진
마치며
바르톨로뮤 디아즈의 탐험을 통해 한 명의 탐험가가 인류사 전반에 걸쳐 영향력이 얼마나 크고 깊었는지를 재차 깨닫게 되었다. 그의 도전과 업적은 단순히 역사 속의 한 장면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인류가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이를 부딪혀 극복함으로써 세계를 다시 새롭게 인식할 기회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의 탐험은 꿈과 희망을 가지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낸 결과였으며, 이러한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우리 곁에 탐험과 도전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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