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출신의 항해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 남아메리카와 아시아를 거쳐 다시 유럽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계획하였고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세계 일주를 나선 인물로 유명하다.
이는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험이었다. 하지만 뛰어난 항해술과 리더십으로 무장한 마젤란은 이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그의 항해는 인류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자 그럼 지금부터 인류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항해 중 하나로 평가받는 마젤란의 세계 일주에 대해 알아보자.
마젤란 일행의 세계 일주
마젤란은 향신료 무역의 독점을 위해 세계 일주를 결심하였다. 당시 유럽에서는 동양에서 수입되는 향신료가 인기품목이었지만 가격이 매우 비쌌기 때문이다. 그는 서쪽으로 항해하여 동양에 이르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자 하였다.
대원 모집과 항해를 위한 준비 과정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은 긴 여정을 앞두고 우선, 귀화를 결심했다.
1505년부터 1512년까지 포르투갈의 해군으로 여러 탐험에 참여했던 그는 제한적인 지원과 포르투갈 왕실과의 갈등으로 인해 결국 스페인으로 옮기게 되었다. 스페인으로 귀화한 마젤란은 오랜 시간 열망해 오던 '신항로 개척'에 대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당시 스페인은 아시아와의 무역을 확대하고자 하였고, 특히 온갖 향신료와 보물을 아시아에서 직접 수입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다. 그는 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Carlos I)'에게 자신의 계획을 제안했다. 바야흐로, 1518년 카를로스 1세는 마젤란에게 "서쪽 항로를 통해 인도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하라"는 임무를 부여하며 대규모 원정을 위한 후원을 승인한다.
항해에 필요한 인원을 모으기 시작했으며, 총 265명의 선원을 모집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갈 곳 없는 부랑자와 사형수 같은 범죄자, 노예 등이었다. 이렇게 모집된 선원들은 보수 대신 새로 발견한 땅을 분배받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선원 구성을 마친 후, 항해에 필요한 물품들을 철저히 준비하였는데 카를로스 1세에게 하사 받은 각 배의 이름은 '빅토리아 호(Victoria)', '콘셉시온 호(Concepción)', '트리니다드 호(Trinidad)', '산 안토니오 호(San Antonia)', '산 티아고 호(Santiago)'로 역할과 특징이 모두 달랐다. 비상식량으로는 건빵과 절인 고기, 물을 저장하였으며 이 중 세 척의 배에는 대형 포 2문과 소형 포 20문도 설치되었다.
비상식량과 장착된 대포는 항해의 안전과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됐다.
또한,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와 함께 향료 제도에 있는 모든 이교도와 영토를 정복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 선단의 명칭은 '산 루카르 데 바라메다(Sanlúcar de Barrameda)'로 정하고, 다섯 개의 문장기를 만들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Sanlúcar'의 어원은 아랍어 'šurūq(아랍어: شروق)'에서 유래했을 수 있으며 이는 '시로코(sirocco) 또는 잘로크(jaloque)'라 불리는 '레반트 바람'의 아랍어 이름이다. 'Barrameda'라는 이름은 아랍어로 '고원의 우물'을 의미하는 'bar-am-ma'ida'에서 유래되었다.
출항: 첫 발을 딛다
바야흐로 1519년 8월 10일, 세비야 항에서 첫 발을 뗐다. 당시 유럽에서는 대서양을 횡단하여 태평양으로 가는 해로를 알지 못했기에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동쪽으로 항해하게 되었다.
항로 개척 사실을 숨기기 위해 공식적으로는 인도양으로 간다고 발표하였고, 대서양을 횡단하면서 폭풍우와 반란 등 온갖 고초를 겪은 끝에 결국 브라질 인근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항해는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는데 이곳에서 물자를 보급하던 중 산티아고 호가 좌초되어 배를 잃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이후 남은 두 척의 배, 빅토리아 호와 트리니다드 호로 항해를 계속 이어나가게 된다.
마젤란은 남아메리카 최남단에 위치한 해협을 발견하고 이를 '라플라타 해협(Rio de la Plata)'이라고 명명했다. '플라타(plata)'는 스페인어로 '은'을 의미하며, 이 지역의 이름은 "은을 발견했다"는 전설에서 유래됐다.
그러나 해협을 발견한 기쁨도 잠시 마젤란 일행은 아르헨티나와 칠레 지역을 지나면서 괴혈병과 굶주림으로 인해 많은 선원을 잃게 된다.
난항: 태평양을 건너다
마젤란은 우여곡절 끝에 '괌 섬'에 도착하였지만 원주민들과의 사소한 분쟁 끝에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끝까지 살아남은 선원들은 지휘관 없이 계속해서 항해를 나섰다. 이 시기 태평양은 무척이나 고요하고 평온했지만, 마젤란 일행은 4개월 동안 식량과 물자가 바닥나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다.
1521년 3월, 마침내 '필리핀 제도'에 도착하였고, '세부 섬'에서는 우호적인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계속되는 여정 중 '막탄 섬'에서의 전투에서 치명적인 피해를 입어 많은 선원이 사망하고 '후안 세바스티안 델 카노(Juan Sebastián Elcano)'를 포함해 18명의 선원만이 살아남았다.
그로 인해, 후임이었던 엘카노가 항해의 지휘권을 물려받았다. 이어서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로 향하는 방향으로 항로를 조정했으며 기나긴 항해 끝에 '마젤란의 대업'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그는 스페인 제국의 공식 탐험가로서 인정받았음은 물론, 원정이 끝난 후에도 여러 번 항해에 나섰다.
델 카노는 마젤란의 사망과 함께 많은 희생이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동료들과의 갈등을 효율적으로 관리 및 협력을 도모한 인물로 평가된다. 마젤란 일행의 업적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대항해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입항: 변화의 바람
마젤란의 항해 이후 세계는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일게 되었다. '태평양'이라는 새로운 대양을 발견하고 필리핀과 같은 미지의 섬들이 발견되면서 기존의 제한적이었던 무역 항로도 점차 확장되었다.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지리적 발견으로, 이전까지 유럽인들에게 미지의 영역이었던 태평양과 남아메리카 해안선이 그들에 의해 밝혀지면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변화는 계속되었는데 서로 다른 문명권 간의 접촉이 이루어졌고 그 일환으로 종교, 예술,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와 융합이 활발하게 나타났다. 이는 곧 인류사에 있어 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경제적인 측면으로는 아시아와의 직접적인 항로가 개척되면서 향신료와 각종 물품의 가격이 크게 하락하였고, 상업은 크게 발달하였다. 더불어 금광과 은광의 발견은 신흥 세력의 탐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서는 향료 무역의 독점권을 두고 전쟁이 발발했으며, 이 전쟁에서 승리한 스페인은 장장 '300여 년간 세계 최강의 제국'으로 군림하게 된다.
항해 기술과 지리적 발견의 중요성
마젤란의 대항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항해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당시의 항해 기술과 지리적 발견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혁신적인 항해 기술인 '나침반과 해도'를 적극 활용하였고, 오랜 여정동안 경도를 측정하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이는 향후 항해 기술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마치며
마젤란의 세계 일주는 인간의 도전 정신을 잘 보여준다. 그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베일에 싸인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며 자연을 이해하고 정복하려는 강한 열망을 드러냈다. 그의 여정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의 상징이 되었다.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점은 그가 불확실한 미래와 거대한 자연의 장벽에 맞서 물러서지 않았으며, 그의 항로 선택은 어려움을 견딜 수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결국 그의 일행은 성공적인 항해를 마쳤고, 돌아온 선원들은 여러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도전할 용기를 보여주었다.
마젤란과는 달리 엘카노의 역할은 종종 간과되어오곤 했다. 마젤란이 생을 마감한 후, 엘카노는 항해를 계속 이끌어 세계 일주를 완수하였으며 이러한 그의 기여는 중요하게 재조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엘카노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침착한 지도력과 결단력으로 여정을 마무리 지었기에 그의 이름은 마젤란과 함께 역사에 남아야 마땅하다.
현대 사회에서 엘카노의 처세술은 위기 상황에서의 침착함과 객관적인 판단, 그리고 팀워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의 리더십은 여러 사람이 함께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위기는 곧 기회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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