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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바스코 다 가마의 잔혹한 유산(+업적,재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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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톨로뮤 디아즈'의 '좋은 희망의 곶' 발견과 함께 유럽은 다시금 아시아를 향한 신항로 개척과 유라시아 간 직접 무역의 희망적인 메시지를 안고 이 막중한 임무를 부여할 새로운 인물의 등장을 알렸다.

 

  머지않아 그의 바통을 이어받은 후계자는 '바스코 다 가마'였다.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를 향한 원정은 포르투갈의 식민지 확장과 함께 무역 지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동시에 그가 개척한 항로와 제국주의적 활동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의 원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그의 탐험과 활동은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지만, 오늘날에는 그가 이끈 제국주의적 팽창의 어두운 측면도 함께 거론되고 있다.

 

 

 


 

 

 바스코 다 가마의 잔혹한 유산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는 1460년경 포르투갈의 '시네스(Sines)'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시네스는 포르투갈의 남서쪽에 위치한 '알렌테조(Alentejo)' 지방의 해안 도시로 대서양과 접해 있는 항구도시다. 그가 태어날 당시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의 초기에 접어들면서 해양 탐험과 함께 무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다.

 

© Statue of Vasco da gama Photo by Georges Jansoone, via Wikimedia Commons

 

  마침 바스코 다 가마가 태어난 시네스는 포르투갈에서 중요한 항해와 상업의 중심지 중 하나였으며 이 지역의 청년들이 항해와 관련된 기술을 배우는 데 아주 적합한 환경이었다.

 

  바스코 다 가마는 귀족 가문 출신인데 그의 아버지는 포르투갈 왕실의 직책을 맡고 있는 군인이었으며 어머니 또한 포르투갈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그는 청년 시절을 포르투갈 왕국의 해군으로서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배경들은 훗날 해상 탐험과 군사 활동 등의 역사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밑천이 되었다.

  

 

 제1차 인도 원정

 

 

  1497년, 드디어 역사적인 탐험의 서막이 오른다. 포르투갈 왕실은 바스코 다 가마에게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라는 중대한 임무를 맡기며 어마어마한 지원을 약속한다.

 

  당시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Manuel I)'는 이 야심 찬 프로젝트가 장차 대륙과 바다를 잇는 초석이 될 것이라 믿었다. 이 탐험은 군사적, 종교적, 재정적 측면에서 국가적 차원의 지지가 아낌없이 주어진 대규모 원정이었다.

 

© 리스본을 출발하는 인도 원정 함대 - Theodor de Bry, Wikimedia


  각각 '성 가브리엘 호(São Gabriel)', '성 라파엘 호(São Rafael)'라는 이름의 카락 2척과 50톤급 캐러벨인 '베리우 호(Berrio)', 그리고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대형보급선까지 총 4척의 선박과 막대한 재정과 물자, 약 170명의 선원 등을 지원했다. 선박의 설계 및 건조 과정은 1488년 아프리카 남단의 '좋은 희망의 곶'을 발견한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참여해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다.

  그리하여, 바스코 다 가마는 포르투갈 왕실의 기대를 잔뜩 안고 '리스본'에서 돛을 펼쳤다. 원정의 주요 배경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후추, 계피 등과 같은 아시아 향신료의 수요가 늘고 그에 따라 값비싼 가격에 거래되면서 기존 무역로는 오스만 제국과 아랍 상인들로부터 통제되고 있었다. 이를 대체해 아시아와 직접 교류할 수 있는 새로운 무역로가 필요했던 것.

 

© Vasco da Gama's first voyage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1497년 7월 15일, 바스코 다 가마와 그의 원정대는 리스본 이남 '카스카이스(Cascais)'를 지나며 대서양으로 진입했다. 이어서 바르톨로뮤 디아즈가 기록한 지도를 따라 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서해안인 '세인트헬레나 베이(St. Helena Bay)'에 도착하여 물자를 보충하고 11월 22일에는 우리가 흔히 '희망봉'으로 알고 있는 아프리카의 최남단, '좋은 희망의 곶'을 성공적으로 통과하게 된다.

 

 

 실패의 쓴 맛

 

 

  1498년 1월 2일 원정대는 모잠비크의 북쪽 항구 도시인 '모잠비크 섬(Island of Mozambique)'에 도착하게 된다. 당시 이 지역은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 상인들과 지역 통치자의 영향 아래에 있었으며 아랍, 페르시아, 인도 등의 상인들이 활발한 상업활동 중이었기에 지역 사회는 이슬람교를 주요 종교로 두고 있었다.

  아랍 상인들의 주요 품목은 각종 향신료와 금, 상아, 직물 등이었던 반면, 바스코 다 가마 일행이 선물과 함께 제시한 교역품들은 현지 통치자와 현지인들로부터 질 낮은 싸구려 물건들로 취급받고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이 지역은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의 필수 거점 중 하나였기에 바스코 다 가마는 급급해졌다. 현지 통치자에게 지원을 얻기 위해 자신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라 소개하며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는 오히려 화근이 되어 아랍상인은 물론, 현지인들에게도 의심과 경계심을 샀다.

  바스코 다 가마는 망망대해였던 앞으로의 항로에 대한 정보 수집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지를 잘 아는 항해사가 필요했고, 신항로를 항해하면서 보급품이나 교역품을 교환할만한 든든한 우호 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들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던 아랍 상인들은 현지 통치자에게 그가 이슬람 세계에 적대적인 유럽의 기독교 세력이라며 경고했고 그 말을 들은 현지 통치자는 처음엔 협조적이었으나 이내 태도를 바꿔 지원을 철회하기에 이르렀다.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원정대는 물자 보급과 교역에 고초를 겪게 되었다. 포르투갈 무장함대의 대포를 들이밀며 협박하기도 했으나 이는 오히려 현지인들과 아랍 상인들로부터 갈등을 초래할 뿐이었다. 그렇게 원정대는 이렇다 할 큰 성과 없이 섬을 떠나게 된다.


  현지 문화와 종교, 무역 관습에 대한 이해 부족이 불러온 참담한 결과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포르투갈과 이슬람권 사이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맴돌게 된다. 나아가 모잠비크 섬에서의 갈등은 당시 원정 초기의 문화·종교적 대립 및 무역 패권을 향한 충돌을 상징한다.

 

 

 불어오는 순풍

 

© Pillar of Vasco da Gama Photo by Mgiganteus, via Wikimedia Commons

 

  하는 수 없이 원정대는 모잠비크 섬을 뒤로하고 다시 항해에 나서 3개월이 지난 1498년 4월 14일 동아프리카 케냐 해안에 위치한 항구도시 '말린디(Malindi)'에 도착하게 된다. 말린디는 당시 동아프리카와 인도를 잇는 항로에 있어서 모잠비크만큼이나 매우 중요한 교두보였다.

 

  이 지역 또한 아랍, 페르시아, 인도 상인들로 북적였으나 인근에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높은 도시인 '몸바사(Mombasa)'가 있어 두 도시는 서로 상업 및 정치적 경쟁 구도에 놓여 있었다.

 

  바스코 다 가마는 말린디의 통치자에게 유럽에서 가져온 비단 직물과 의류, 구리와 각종 황동 액세서리, 그 밖에도 포르투갈산 고급 와인과 같은 식료품 등의 선물을 통해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이는 포르투갈 문화의 우수성과 부유함, 정교한 제조술을 알리는 수단으로 활용되어 관계를 강화하는 데 핵심적으로 기여했다.

 

  한창 몸바사와의 갈등에서 우위를 점해야 했던 말린디의 통치자는 마침 새로운 동맹을 찾고 있었기에 바스코 다 가마의 원정대의 등장에 환대로 답했다.

 

  또한, 원정대의 목적지인 인도 '캘리컷(Calicut)'에 대한 정보와 긴 원정에 필요한 식량과 물자 보급 등 다양한 방면으로 협력함으로써 관계를 다졌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도움이 된 건 다름이 아닌 현지 항해사를 제공받은 점이었다.

 

  현지 항해사는 항해 중에 발생할 계절풍 '몬순(monsoon)'에 관한 정보와 동아프리카 해안을 떠나 캘리컷으로 향하는 최적의 시기와 항로 등에 대해 알려주어 리스크를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캘리컷과의 충돌

 

 

  바스코 다 가마는 현지 항해사의 도움을 받아 인도양을 가로질러 드디어 1498년 5월 20일 인도의 캘리컷에 닻을 내리게 된다. 그 당시 캘리컷은 군주 '자모린(Zamorin)'의 통치 아래 아라비아, 페르시아, 인도 등 여러 문화권의 상인들이 모여 교류를 이루고 있는 번영한 항구도시였다. 주요 품목은 후추와 계피 등을 포함한 향신료였기에 유럽 상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지역이었다.

 

© Veloso Salgado,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그는 캘리컷에 닻을 내리자마자 자모린을 찾아가 포르투갈 왕국의 사절로서 교역 협정 제안에 관련해 회담을 요청했으나 첫 조우에서부터 여러 장애물에 부딪혀 협상은 난관에 봉착했다.

 

  이미 캘리컷의 무역망은 아주 오래전부터 페르시아, 아랍, 인도 상인들로부터 주도되고 있었다. 훨씬 더 좋은 물품들을 이전부터 거래하고 있던 자모린은 바스코 다 가마의 제안에 응할 이유가 없었다.

 

  또한, 그들의 등장은 아랍 상인들로 하여금 '인도양 무역망에 개입하려는 거대한 위협'으로 느껴졌기에 자모린에게 바스코 다 가마를 견제해 줄 것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그 말을 들은 자모린은 "포르투갈과의 장기적인 교역을 원한다면 더 많은 고급 상품을 가져오라" 요구하기에 이른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가다 보니 둘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바스코 다 가마는 결국 별다른 성과 없이 제한된 양의 후추와 계피 등의 향신료만을 확보한 채 돌아서게 된다.

 

© Monsoon clouds arriving at Port Blair, Andaman, India(RIDHVAN SHARMA), Wikimedia

 

  1498년 8월, 인도양의 몬순이 바뀌기 전에 서둘러 캘리컷을 떠나기로 결심했으나 출항 준비 과정 중 문제가 생겼다. 당시 이곳은 캘리컷 항구의 법에 따라 교역 후 출항하려는 모든 선박은 정해진 세금을 내야 했다. 하지만 바스코 다 가마는 "자신들은 포르투갈 왕국의 사절로서 특별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라고 주장하며 세금 납부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자모린의 입장에서 당연히 그들이 현지 규칙을 따르지 않는 무례한 외국 상인에 불과했고 이에 대응해 "그들의 선박을 일부 압류하고 물품 및 선원들을 억류하겠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바스코 다 가마는 자모린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기세등등하게 '포격 준비'를 지시하며 포르투갈 함대의 무력을 과시했다. 그도 그럴 듯이 그의 함대에는 최신식 대포와 화기로 무장되어 있었고, 이는 캘리컷의 방어 수단에 비교해 봐도 훨씬 우월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그는 선원들에게 출항을 알렸다. 이러한 기류는 물리적인 충돌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포르투갈, 캘리컷 간의 외교적 신뢰를 잃고 나아가 적대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Home Sweet Home

 

 

  캘리컷을 떠나 본국으로의 귀환은 더더욱 난항을 겪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인도양에서 몬순을 잘못 계산해 예상보다 험난한 항로를 통해서 돌아가야 했다. 항해기간이 길어질수록 보급품은 부족해지고 선원들은 괴혈병과 같은 질병에 시달려 사망자가 속출하는 등 심각한 상태에 빠지고 만다.

 

  이에 바스코 다 가마는 침착하게 동아프리카 해안선을 따라 몇몇 항구에 들러 필요한 보급품들을 얻으며 이동했다. 그중에서는 말린디처럼 그들에게 친선적인 항구도 있었지만 모잠비크 같이 적대적인 반응도 심심찮게 마주했다. 그때마다 바스코 다 가마는 추가적인 충돌로 이어지지 않게 무력 사용은 자제하고 돌아가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리하여 1499년 9월, 포르투갈 왕국으로의 귀환에 성공한다. 긴 시간에 걸쳐 돌아오는 과정 중 선원의 절반 이상을 잃는 만큼 희생이 따랐지만, 전례에 없던 인도로 향하는 신항로를 개척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선구자로서 환대받았다. 또한, 당시 국왕 '마누엘 1세'는 그를 '인도 해양의 제독(Admiral of the Indian Seas)'으로 임명해 그의 업적을 기리기도 하였다.

 

 

 제1차 인도 원정 이후 - 비하인드 스토리

 

 

  바스코 다 가마의 제1차 인도 원정 이후 1500년, 국왕 마누엘 1세의 명령을 받은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Pedro Álvares Cabral)'가 다음으로 인도 원정을 맡게 되었는데 주요 목표는 포르투갈의 공장 설립 및 교역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원정 역시 쉽지 않았다. 자모린은 일관적인 태도로 기존의 아랍 상인들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는 반면, 포르투갈과의 교역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둘 사이의 협상이 결렬되자, 계속되는 포르투갈의 인도 진출을 위협으로 느낀 현지 아랍 상인들은 포르투갈의 상인들을 공격하기에 이르렀고 일부가 목숨을 잃는 상황에 직면하자 이에 맞서 카브랄은 캘리컷 항구에 정박해 있던 아랍 상선들을 나포하거나 불태웠으며 캘리컷 도시에 무차별적인 포격으로 대응해 도시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들의 공격은 단순한 군사적 보복을 넘어 수백 명이 넘는 캘리컷의 민간인들에게도 큰 피해를 끼쳤다. 이 일로 인해 포르투갈은 군사적 우위를 확실하게 보여줬지만 캘리컷과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으며 서로 적대적인 관계로 대립하게 된다.

 

  또한, 포르투갈의 무역 경로와 상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지역 통치자들과 상인들 사이에 포르투갈에 대한 반감이 갈수록 커지게 된다.

 

 

 제2차 인도 원정

 

 

  1502년 2월, 바스코 다 가마는 막중한 임무에 압박감을 느끼며 다시금 제2차 인도 원정의 지휘를 맡게 된다. 이번 원정에 있어 주된 목표는 2년 전 카브랄이 맡은 원정에서 포르투갈이 겪은 수모를 되갚아 줄 '인도양에서의 해상 무역로 봉쇄'와 '캘리컷에 대한 보복'이었다.

 

  마누엘 1세는 인도와의 무역로 확보를 위해 군사적 압박을 포함해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20척 이상의 대형 함대와 1,000명 이상의 선원과 군사들이 동원되었으며 함대에는 강력한 대포와 화기로 무장해, 단순 교역을 위한 원정뿐만이 아니라 무역로를 지배하기 위한 군사적 충돌 또한 염두에 두었다.

 

 

 들불처럼 번지는 제국의 야망

 

© George McCall Theal,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바스코 다 가마는 동아프리카 항로를 지나며 여러 항구에서 보급품을 받고 동맹 관계를 결속하며 항해를 이어나갔다. 희망봉을 지나면서 원정대는 계획했던 대로 강력한 화력을 앞세워 인근의 해안도시들에 지배력을 과시하게 된다. 그중 동아프리카의 스와힐리 해안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국가인 '킬와(Kilwa Kisiwani)'가 첫 번째 희생양이 되었다.

 

  킬와는 아프리카에서 금, 상아 등을 사서 아랍과 페르시아, 인도에 팔고 중국에서 가져온 비단과 인도의 면화 등을 다시 아프리카에 파는 중계무역 방식으로 이윤을 얻어 황금기를 이루고 있던 지역이었으며 이는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바스코 다 가마는 킬와에 닻을 내리고 술탄을 만나 포르투갈에 대한 충성과 정기적인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덧붙여, 포르투갈이 인도양 무역을 지배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만약 이 요구를 거부할 시 킬와에 큰 군사적 위협이 될 것을 시사했다. 이에 망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술탄은 그들의 강압적인 협박에 가까운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도양을 피로 물들이다

 

 

  킬와를 뒤로하고 인도로 가는 항해 중에도 그들은 닥치는 대로 공격하고 약탈했다. 이는 인도양의 제해권 장악과 동시에 경쟁자였던 아랍 상인들을 주요 타깃으로 삼았다. 당시 인도양 무역은 아랍 상인들이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력 위협과 공포를 통해 이들로부터 값비싼 향신료, 고급진 섬유와 귀금속 등을 약탈했다.

 

  대상 선박은 해적선, 무역선에만 그치지 않았는데 아랍의 순례선 '메이라 호(Meira)'는 캘리컷에서 출발해 인도양을 항해하던 도중 그들에게 나포되어 선박에 있던 귀중품과 화물을 모조리 약탈당했다.

 

  애초부터 메이라 호는 포르투갈의 무장 함대를 맞설 능력이 없었는데 무장하지 않은 민간 선박이었을뿐더러 약 400명가량의 탑승객 대부분은 민간인이었고 일부는 여성과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항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스코 다 가마는 무고한 생명들을 풀어주기는커녕 화물칸에 가두고 선박과 함께 불태워버려 모두 화염 속에서 희생되고 만다. 그의 비인도적인 행위는 여기서 그칠 줄 모르는데 1500년에 있었던 '캘리컷 학살에 대한 복수'라며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기까지 한다.

 

  이미 세상이 기억하고 있던 위대한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는 없어진 지 오래였다.

 

 

 멈출 줄 모르는 해악

 

© Ezhimala beach Photo by Sreejithk2000, Wikimedia

 

  1502년, 캘리컷에 당도하기 전에 앞서 인도 서북부에 위치한 항구 도시인 '칸누르(Kannur)'에 도착하게 된다. 바스코 다 가마는 칸누르의 통치자와 만남을 시도했고 다행히 협상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지배력을 확보하고 있는 포르투갈을 보고 위협을 느낀 아랍 상인들이 통치자에게 반발하고 이내 갈등이 격화되자 아랍 상인들은 다방면으로 포르투갈과의 교역을 막으려 했다.

 

  그러자 바스코 다 가마는 상업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항구를 장악하고 아랍 상인들의 선박을 나포했으며 이들을 약탈하고 공격하는 것도 모자라 불을 지르는 등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충격과 공포에 휩싸이게 했다.

 

 

 캘리컷의 비극

 

 

  1502년 10월 25일, 바스코 다 가마는 그의 함대를 이끌고 과거의 협상 실패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캘리컷으로 향했다. 항구에 도착하기 전, 그는 인근 아랍 상선들과 지역 상인들에게 무력 충돌을 일으켰고, 도착한 후에도 무장 함대를 통해 항구와 주변 지역을 파괴했다.

 

  이로 인해 캘리컷의 방어선과 상업 시설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포격은 11월 1일부터 시작되었고, 이틀 동안 약 400발의 대형 포탄과 소구경 포탄이 발사되었다.

  바스코 다 가마의 공격은 단순한 군사적 목표에 그치지 않고 민간인 거주지역에도 무차별적으로 포탄을 퍼부었다. 이 공격은 캘리컷 주민들과 상인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고, 자모린이 포르투갈의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압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캘리컷의 모든 무역 활동은 사실상 마비되기에 이르렀다. 포격이 끝난 후에도 인근에서 나포한 상선들을 약탈하고 불을 지르며, 탑승객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이들의 손과 코를 잘라 가방에 담아 자모린에게 "카레를 만들라"는 메모와 함께 보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공격으로 자모린은 통치권에 큰 타격을 입고 캘리컷은 아랍 상인들과 인도 무역 네트워크에서 완전히 고립되었다. 캘리컷 포격 이후 포르투갈은 인도양에서의 지위를 확립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지역 사회의 반발과 저항을 초래하게 되었다.

  바스코 다 가마는 이후 인도 서해안의 다른 지역들과의 협력을 강화했다. 칸누르와 코친 같은 항구 도시들과 동맹을 맺어 포르투갈의 상업적 거점을 마련하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1503년 2월 말, 그는 주요 동맹 도시국가에 설립한 포르투갈 공장에 어느 정도 군사력을 남겨두고 리스본을 향한 귀향길에 올랐다. 1503년 말, 그는 긴 여정 끝에 본국에 도착했으며, 그의 함대는 인도에서 가져온 대량의 향신료와 상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는 포르투갈 왕실과 상인들에게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안겨주었다.

  귀환 후, 바스코 다 가마는 두 번째 원정의 성과를 국왕에게 보고했다. 그는 캘리컷과의 갈등, 코친 및 칸누르와의 동맹, 그리고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에서의 포르투갈 우위를 강조했다. 이러한 보고 덕분에 그는 국왕으로부터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더 큰 명성과 지위를 얻게 되었고, 제3차 인도 원정을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

 

 제3차 인도 원정

 

 

  그로부터 21년이 지나 1524년 초, 바스코 다 가마는 당시 60대 중반이라는 고령의 나이로 다시 배에 오르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건강 상태도 좋지 않았지만 인도에서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련한 지도자가 필요했던 포르투갈 국왕 '주앙 3세(João III)'의 부름에 응하게 된다.

 

  이번 원정에서의 함대는 소규모로 구성되었는데, 그 주된 임무는 정복이나 새로운 무역로 개척이 아니라 행정적 개혁과 무역 질서 회복이었다.

  바스코 다 가마는 동아프리카의 주요 거점에서 물자와 정보를 확보하며 항해를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그는 지역 동맹의 결속력을 다지고 무역망을 재점검하는 데 주력했다.

  1524년 9월, 희망봉을 지나 코친에 도착한 바스코 다 가마는 포르투갈 관리들과 만나 인도 현지의 정치적 상황과 무역 네트워크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많이 흐름에 따라 포르투갈의 인도 관리들 사이에는 부패와 사리사욕이 만연해 있었고,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부 부패한 관리들을 해임하고 포르투갈의 통치를 강화하려고 했다.

  또한, 캘리컷의 통치자인 자모린과의 관계 개선에도 힘썼으나, 자모린은 여전히 포르투갈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이전의 군사적 만행과 강경한 정책 때문이었다.

 

© xiquinhosilva from Cacau, via Wikimedia Commons


  그러던 중 바스코 다 가마는 인도 도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심각한 건강 문제를 겪게 되었다. 현지의 더운 기후와 스트레스, 그리고 고령은 그의 말라리아를 악화시켰다. 결국, 그는 정치적 책임감을 안고 나선 제3차 인도 원정 중에 현지의 복잡한 문제들을 미완으로 남기고, 1524년 12월 24일 코친에서 세상을 눈을 감게 된다.

 

 

 마치며

 

 

  바스코 다 가마의 업적과 만행을 살펴보면, 그의 탐험이 단순한 발견을 넘어서 잔혹한 폭력의 역사였다는 점을 느낀다.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며 상업적 이익을 추구했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도 많은 원주민들이 고통을 겪었다. 특히, 메이라 호 사건과 캘리컷 포격 사건은 그의 복수를 넘어서는 악행으로 제국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무자비한 수단을 선택한 참담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그의 행동은 '인류의 탐험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왜곡한다. 이러한 사례는 탐험이 단순한 발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그 이면에는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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