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없고 드넓은 대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전설 속 거대한 크라켄과 괴수에 대한 두려움을 주었다. 동시에 어떤 이는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품기도 했다.
위대했던 탐험가
통념적으로 신대륙의 발견은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역사적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정작 그 이면을 들여다보는 이는 드물 것이다.
번쩍이는 투구에 우레와 같은 무기를 지닌 이방인의 등장에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은 맥없이 스러져갔다. 그들에게 있어서만큼은 신대륙의 발견이 '최선의 사고(思考)'가 아닌 '최악의 사고(事故)'였으리라.
물론, 콜럼버스는 서구 열강의 새로운 지평을 연 탐험가로서 평가받는다. 그의 여정은 불분명한 미래와 맞서고 세계의 지도를 새롭게 써 내려갔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탐욕이 부른 '만행'은 원주민들의 문화와 전통을 짓밟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이제 우리는 콜럼버스라는 인물이 가져온 위대함과 잔혹함의 양면성을 다시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을 통해 그가 남긴 여정에 승선해 보자.
항해에 대한 열망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으로, 무역업을 하는 가정에서 자라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항해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그는 지중해 지역을 항해하며 지리학과 천문학을 공부하였고, 장차 대서양을 건너 아시아로 가는 항로 개척을 계획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아시아와의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려는 욕구가 컸으나, 대서양을 건너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로 여겨졌다.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을 포함 유럽의 여러 나라에 대서양 항해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한 뒤, 유일하게 스페인 왕실을 설득하여 1492년 8월 3일, '산타마리아 호', '니냐 호(Niña)', '핀타 호(Pinta)' 세 척의 배를 이끌고 서쪽으로 항해를 나서기에 이르렀다.
신대륙을 찾아서
콜럼버스는 항해를 떠나기 전, 지도 제작자와 천문학자 등 다양한 전문가들과 함께 경로를 계획하고 선박을 준비했다. 스페인 왕국은 그의 항해를 지원하기 위해 앞서 설명한 산타마리아 호라는 이름의 '카라카(Carrack)' 1척과 각각 니냐, 핀타 호라는 '카라벨라(Caravela)' 2척을 제공하였으며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와 그의 120여 명의 선원은 팔로스 항구에서 돛을 펼쳤다.
카락이었던 산타 마리아 호는 콜럼버스의 첫 번째 항해에서 '기함(Flagship)'으로 선택되었으며 다른 2척의 선박보다 규모가 컸다. 핀타 호는 비교적 소형인 캐러벨의 장점을 살려 신속하게 앞서가 새로운 지형들을 탐험하고 정찰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스페인어로 '어린 소녀'라는 뜻의 니냐 호는 이 중 가장 잘 유지되고 오래까지 살아남은 배로 유명하다.
대서양을 넘어서
이윽고 콜럼버스의 선단은 대서양을 횡단하는 긴 여정을 시작하였으나, 이 항해는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만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서쪽으로 항해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단은 강한 바람과 높은 파도, 식량과 물 부족, 질병 등 다양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고 콜럼버스는 선원들의 불만을 다스리기 위해 일부러 '실제 항해거리 보다 줄인 거리로 속여 기록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불안을 달랬다. 또한, 그는 "항해를 계속하는 한 반드시 새로운 땅을 발견할 것이다"라며 희망적인 메시지로 선원들에게 동기부여해주기도 했다.
산 살바도르(San Salvador)
1492년 10월 12일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처음으로 도착한 섬으로 여겨진다. '신성한 구세주'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신의 가호를 받아서 섬을 발견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 Wikipedia
그렇게 2달의 시간이 지났다.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1492년 10월 12일, 앞서서 항해 중이던 핀타의 선장 '마르티네스'가 콜럼버스에게 신대륙의 존재를 통보했고 현재의 '바하마 제도'의 한 섬에 도달하게 된다. 콜럼버스는 이곳을 인도의 일부라고 착각했다. 이는 당시 신대륙의 발견으로 평가되었지만 실제로는 오늘날의 아메리카 대륙 본토 인근 연안으로 밝혀졌다.
연이은 발견
들뜬 마음을 추스리기도 잠시, 탐험을 이어가던 중 '카리브해'에 닻을 내렸고 이들은 원주민인 '타이노(Taino)'족과 접촉하게 되었다. 콜럼버스는 그들을 인도 사람이라는 의미의 '인디언'이라 불렀다. 원주민들은 그를 '신적인 존재'로 여겼고 초기에는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콜럼버스는 그들의 문화를 관찰하며 곧 물물교환을 통한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향료, 담배 등이 주된 품목이었다.
이어서, 불운과 행운이 교차하게 되는데 1492년 12월 탐험 중 '하이티'와 '쿠바'를 발견, 하이티(오늘날 아이티)에 상륙 중 콜럼버스의 주력 기함이었던 산타마리아 호가 산호초에 걸려 침몰하게 된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콜럼버스 일행은 침몰된 산타마리아 호의 부품과 자재들을 활용해 임시요새이자 첫 번째 식민지인 '라 나비 다드(La Navidad)'를 설립했다. 스페인어로 '탄생' 즉, 크리스마스를 가리키는 이곳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지어진 탓에 그렇게 붙여졌다.
이 식민지는 총 36명의 남성으로 통치되었는데 이들은 의사, 목수, 재단사, 포수 등 다양한 직업군으로 구성되었으며 식량과 무기, 무역상품 등이 보급되었다. 이토록 콜럼버스가 이곳에 열과 성을 다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 유럽과 아시아의 교역을 잇는 경제적 요지
- 신대륙의 자원을 본국으로 송환하기 위함
- 탐험의 성과를 보여 왕실로부터의 지원을 꾀함
- 다음 탐험과 항해를 위한 보급 기지 역할
- 스페인의 식민지 경쟁에 일조
여담이지만 콜럼버스는 눈을 감는 그날까지 이곳을 '아시아'의 일부로 착각했다고 한다.
1493년 1월 4일 금요일, 콜럼버스는 선단의 일원인 핀타 호를 찾으러 나서게 된다. 핀타 호는 '마르틴 알론조 핀존(Martín Alonso Pinzón)'의 지휘 하에 있었는데 11월 21일부터 6주 동안 아무 소식이 없었기에 콜럼버스의 의심을 샀다. 더욱이 마르틴이 먼저 금광을 찾는 것도 모자라 콜럼버스의 업적을 송두리째 자기 것으로 만들어 본국에 보고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곧이어 콜럼버스는 본대로 복귀하는 핀타 호를 찾았고 큰 언쟁이 있었지만 1493년 3월, 긴 여정 끝에 콜럼버스는 핀타와 니냐를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오기에 이른다.
스페인 왕실에 자신이 발견한 것들에 대해 보고했고 신대륙에 관한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이 가득 찬 흥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탐욕으로 얼룩진 이면
1493년 9월 24일 콜럼버스 일행은 스페인 왕국의 '카디스 항(Puerto de Cádiz)'에서 두 번째 돛을 펼쳤다. 귀국한 지 장장 6개월이 흐른 후였다. 2차 원정의 주된 목표는 카리브해의 탐험과 식민지 건설이 주목적이었다.
이번에는 17척의 대선단과 함께 1,200명의 선원이 동원되어 대규모 탐험대를 이루었는데 이 중에는 농부, 대장장이 등 각양각색이었고 많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금에 대한 부푼 기대를 안고 있었다.
1493년 11월 27일, 나비다드 요새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는 불타버린 폐허와 기독교인 8명의 시신 말고는 이미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 요새는 최초에 비교적 평화로웠으나 오랜 타지 생활로 인한 선원들의 불만이 주요 원인이 되어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빚었다.
이들은 원주민들을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황금을 요구하는 것도 모자라 노동력을 착취하고 살해하기까지 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더군다나 콜럼버스가 떠나자마자 통치를 맡은 인원들이 각자 금과 여자들을 거느리고 다툰 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에는 원주민들에게 몰살당했다.
그리하여, 콜럼버스는 '푸에르토리코, 자메이카, 도미니카 공화국'을 거쳐 식민지 건설을 시도했고 결국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먼 북부에 식민지를 건설하게 된다.
이 식민지는 '이사벨라 1세'의 이름을 따 '라 이사벨라(La Isabela)'라고 명명했다. 콜럼버스는 식민지를 건설하자마자 원주민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하였고 원주민들의 거센 저항이 일어나자 이를 강제로 억누르기 위해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주변의 호전적인 부족, 평화롭게 지내던 부족할 것 없이 끔찍하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당시 원주민들은 돌로 만든 무기들로 싸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3차 원정에 이어 마지막 항해인 4차 원정까지 진행했으나 원주민들과의 마찰은 계속되었고 콜럼버스의 잔혹함은 날이 갈수록 더해지기만 했다. 맹견인 '마스티프'를 풀어 학살하는가 하면 노예로 팔기도 하였으며 9살부터 35세의 여성들은 강제로 은화 한 두 닢에 매춘부로 만들었다.
그로 인해 원주민들의 인구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줄게 되었다. 30만 명에 육박했던 인구수가 2년 만에 20만 명으로 감소했으며 결국에는 500명도 채 남지 않게 되자 노동력이 부족해져 콜럼버스는 아프리카 계 흑인노예들까지 수입해 오기에 이른다.
마지막 원정 그 이후
1502년부터 1504년까지 콜럼버스는 네 번째 원정을 떠났으나, 이 원정 역시 실패로 끝났다. 실패와 갈등이 항상 뒤따랐고 그의 명성과 명예는 다시 회복이 불가능하리만큼 크게 실추되었다.
콜럼버스는 이후 마지막 몇 년 동안 스페인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자신의 업적에 대한 인정과 보상을 요구하였으나 왕실은 그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그의 요구에는 응답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내며 그의 탐험에 대한 인정은커녕 계속해서 불명예스러운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1506년 5월 20일, '팔렌시아'에서 향년 55세로 사망하였다. 그는 자신의 탐험과 발견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믿었으나, 그의 사망 당시 평가는 복잡하고 비판적이었다. 그는 경제적 어려움과 건강 문제에 시달리며 마지막을 맞이하였고, 왕실의 외면과 탐험 성과에 대한 회의 속에서 고독한 죽음을 맞이했다.
마치며
역사적 평가와 현대적 시각으로 봤을 때 콜럼버스의 발견은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평가된다. 그의 발견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모두 존재하는데 긍정적인 측면으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로 손꼽히며, 미지의 세계를 향한 인간의 도전 정신과 대자연에 맞서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또한,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들여온 다양한 물품 중 감자, 옥수수, 카사바, 고구마 등은 기존 유럽의 주식이었던 밀이나 쌀보다 칼로리와 영양학적인 측면에서 우수했기 때문에 18~19세기의 아프리카-유라시아 인구의 25%가 증가하는 데에도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원정은 '천연두'와 '매독'과 같은 각종 질병의 이동경로로 이용되기도 했다. 더군다나 원주민들의 문화와 전통을 끊임없이 억압하고 파괴한 점은 당대를 넘어서 현재까지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대에 이르러서 우리는 그의 업적을 재평가해야 한다.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고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모두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류사 전반을 통틀어 원주민과 정착민이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한 사례는 분명 존재한다. 17세기 프랑스인들이 현재의 '캐나다'인 '뉴프랑스'에 정착하면서 서로 문화와 전통을 존중했듯이 말이다. 만약, 콜럼버스 일행이 그들을 상호존중과 협력을 토대로 관계를 쌓아나갔다면 아마 우리 곁에 '위대했던 사람'이 아닌 '위대한 사람'으로 길이 남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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