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 오는 날 나는 흙냄새가 좋다면
비 오는 날, 창문을 열자마자 코를 간질이는 향이 있다. 갓 내린 빗물과 흙이 어우러져 풍기는, 어쩐지 어린 시절 시골마당이 떠오르게 하는 그 냄새. 우리는 그것을 ‘흙냄새’라 부른다.
누군가는 이 향을 맡으면 안정감을 느낀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갑자기 시적인 감성에 젖는다. 하지만 단순한 향으로 치부하기엔 이 냄새는 너무나도 섬세하고, 우리의 감성을 건드리며, 과학적으로도 매혹적이다.
이 향의 정체는 무엇이고, 왜 우리는 이토록 그것에 반응하는 걸까? 오늘은 ‘비 오는 날의 흙냄새’라는 일상적이면서도 시적인 현상을 과학과 감성의 렌즈로 함께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름을 가진 향기, '페트리코르'

언젠가부터인가 우리가 '흙냄새'라 부르는 이 냄새에도 이름이 있다. 바로 ‘페트리코르(Petrichor)’다. 이 단어는 1964년 오스트레일리아의 과학자 이사벨 조이 베어(Isabel Joy Bear)와 리처드 그레니(Richard Grenne)가 <Nature>지에 발표한 논문에서 처음 등장했다.
‘페트리코르’는 그리스어 ‘페트라(petra, 바위)’와 ‘이코르(ichor, 신들의 피)’를 결합해 만든 신조어다. 마치 땅이 생명을 되찾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 향은 단순히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건조한 시기 동안 토양이나 암석 표면에 쌓인 식물성 기름과 미생물의 대사 산물이 빗방울에 의해 공기 중으로 퍼지면서 발생한다. 즉, 흙은 빗물을 만나자마자 ‘숨겨왔던 향기’를 내뿜는다.
향기의 방출 매커니즘
빗방울이 지면에 떨어지면 단지 스며들 뿐만이 아니라 작은 기포를 만들며 튄다. MIT의 과학자들은 2015년 고속카메라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이 빗방울이 떨어지는 순간 미세한 에어로졸(aerosol, 미세입자)가 공기 중으로 방출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에어로졸에 바로 그 향기의 분자들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 실험 결과는 <Nature Communications>에 발표되었으며, 흙냄새는 주로 ‘게오스민(Geosmin)’이라는 휘발성 유기화합물(VOC)에 의해 유발된다고 설명되었다.

게오스민은 방선균(Actinobacteria)이라는 토양 미생물이 생성하는 물질이다. 인간은 이 성분에 극도로 민감하며, 5조 분자의 농도에서도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게오스민의 게오(geo)는 땅을, 오스메(osme)는 냄새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1965년 미국의 생화학자 낸시 N. 거버(1929~1985년)와 프랑스계 미국인 생물학자 허버트(Hubert A. Lechevalier, 1926~2015년)에 의해 만들어졌다.

게오스민 또는 지오스민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선한 흙냄새’의 주역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물질은 와인 생산자나 식수 처리자들에겐 ‘악몽’이기도 하다. 물이나 와인에 섞이면 그야말로 ‘흙탕물 맛’을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 상태에서 게오스민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평안함을 전달하는 작용을 한다. 이 현상은 인간의 진화적 기억과도 연결된다. 과거 인류는 건기 후 첫 비가 내리는 순간을 생존과 직결된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했다.
물이 곧 생명이었던 시절, 비 내린 땅에서 풍겨오는 냄새는 단비, 생존, 풍요를 의미했다. 그래서인지 이 냄새는 본능적으로 ‘긍정적인 경험’으로 인식되며, 감성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이 향을 유독 좋아하는 사람들
개인의 후각 감도 차이도 있지만, 심리학적 요인이 더 큰 역할을 한다. 2012년 발표된 하버드 의대의 심리생물학 연구에 따르면, 냄새와 감정 사이에는 밀접한 상호작용이 존재하며, 특히 어린 시절의 경험은 후각적 감정 반응 형성에 강한 영향을 준다고 했다.

다시 말해, 어린 시절 비 오는 날의 즐거운 기억이 많았던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 냄새에 긍정적인 감정을 덧입히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의 연결은 단지 추억의 문제를 넘어서 정서안정에 기여한다. 그래서 심지어 일부 향수 브랜드에서는 게오스민을 인공적으로 배합해 ‘흙향’ 테마의 향수를 제작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딥디크의 '롬브로단로(L'Ombre dans L'Eau)'처럼 말이다.
자연과의 감각적 연결이 중요한 요즘, 이러한 향수는 특히 ‘숲세권’을 그리워하는 도시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식물도 반응한다고?

놀랍게도, 식물들 또한 이 냄새에 반응한다. 2020년 MIT 생물학과 연구진은 게오스민이 주변 환경에 대한 식물의 반응성을 자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실험에서는 토양 중 게오스민 농도가 올라갈 경우 특정 식물의 뿌리 성장 패턴이 달라지는 것을 관찰했다.
이는 단지 냄새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닌, 생태계 전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생물학적 신호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즉, 페트리코르는 사람에게만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식물에게는 일종의 ‘Dinner bell(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일 수 있다.
마치며,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던 ‘비 오는 날의 흙냄새’는 그저 한 편의 낭만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땅과 비, 그리고 생명이 만들어낸 향기의 오케스트라였다. 인간의 기억과 과학, 생태계가 얽혀 있는 이 작은 향기에 우리는 또 한 번 ‘자연이 우리의 일부’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다음번 빗소리에 귀 기울일 땐, 그 소리 너머의 향기까지 기억해보자. 그리고 그 안에서 조금은 숨을 고르고, 조금은 마음을 맡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출처
- Bear, I. J., & Thomas, R. G. (1964). Nature, 201: 993–995.
- Jiang, Y., et al. (2015). “Splash-induced aerosol and odor emissions from raindrops on soil.” Nature Communications, 6, 7084.
- Herz, R. S. (2012). “Odor-evoked memory, emotion and physiological responses.” Harvard Medical Review.
- Regev, I. et al. (2020). “Root responses to geosmin signaling in wet soil.” MIT Plant Physiology Lab Internal Re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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